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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에 선풍 떨친 실존한 전설적 도인 "방중원"

일제시대 한국불교 교문(敎門)의 거봉으로는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낸 박한영사(朴漢永師)가 있었고 선문(禪門)의 고승으로는 경허(鏡虛) 만공(滿空)을 비롯한 오대산에서 선풍(禪風)을 떨친 한암사(漢岩師)가 있었다.

 한암의 속명은 중원(重遠)이고 온양 방씨(方氏)로 한암(漢岩)은 그의 법호이다. 그의 선대는 평안도 맹산(孟山)에서 살았으나 구한국 말에 난을 피하기 위하여 그의 부모가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하여 한암은 1876년에 화천 땅에서 태어나 만년을 오대산 상원사에서 지냈다. 1951년에 상원사에서 입적하여 그의 부도가 상원사 앞에 있으니 승려의 생애가 운수행각(雲水行脚)이여서 고정된 거처가 없어 어느곳 사람이라 규정짓기 어려운데가 있는데 비하면 한암은 강원도에서 나서 승려생활의 상당기간을 강원도에서 하다가 강원도에서 입적하여 그의 행적이 이 곳에 많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도가 여기에 있으니 강원도 인물이 분명하다.

 한암이 어려서 서당에서 사략을 읽다가 “태고(太古)에 천황씨(天皇氏)가 있었다”는 구절을 읽고는 그 이전이 궁금하여 훈장에게 물었더니 “그 이전에는 반고씨(盤古氏)가 있었다”하기에 “그러면 반고씨 이전은 누구냐”고 추구했다는 일화가 남아 전한다. 이 회의를 품은지 10년간 두루 유교의 경전을 섭렵했으나 이 단순한 회의를 유교는 풀어주지 못한 채 22세 때에 금강산 구경을 가서 대자연의 위용에 접하고는 종교적 감흥이 일어 입산할 것을 결심하고 그 길로 내금강의 명찰인 장안사를 찾아 행름(行凜)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자가 되었다.

 그가 불교에 들어와 최초로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신계사의 보운강회에서 보조(普照)국사의 수심경을 읽다가 “만일 마음 밖에 불(佛)이 있고 자성(自性)밖에 법(法)이 있다는 생각으로 불도를 구하려면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외우고 몸을 불사르는 고행으로 수도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를 퍼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수고로움을 더 할 뿐이다”라는 구절에서 물량의 세계는 꿈속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 성주 청암사(靑岩寺)에서 당시 조선 불교의 중흥조라고 불리우던 경허(鏡虛)화상을 만나 설법을 청하였더니 경허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무릇 형상(形相)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형상 있는 것이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어렸을 때의 “반고이전은 누구냐”는 의문도 가시고 세속의 눈이 씻어져 깨달음의 경지에 들게 되었다. 그가 이 때의 개심한 심경을

 

 脚下靑天頭上巒

 本無內外亦中間

 跛者能行盲者見

 北山無語對南山

 다리 밑은 푸른 하늘 머리위에 산봉우리

 안팍과 중간은 본시 없는 것

 절름발이 걸음 걷고 소경은 눈을 뜨고

 말없는 북산은 남산을 대하였네

 

 그의 나이 22세 때에 깨달은 심경을 노래한 시이고 이 시를 본 경허가 대중 앞에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고 극찬했다. 조선 불교의 중흥조라고 불리우던 경허가 북관 길에 오르면서 한암에게 보낸 글의 서문에

 “···내(경허) 다만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지냈더니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그대(한암)를 만나게 되었다. 그대 성행을 순직하고 학문은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 평생 처음 만난 사람 같이 생각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서로 이별하게 되니…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마음을 틀 수 있겠는가…”

 조선 불교계의 대덕이라 이르던 경허가 한암에게 한 말이니 속인 오심한 불교계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우나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불교계에서 한암의 경지가 어떠하였던지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한암은 실존한 전설적 도인이다. 오대산 중대사 뜰에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고 이 나무 옆에 평창군 교육장이 쓴 “이 단풍나무는 방한암선사가 처음으로 오대산에 들어 올 때에 짚고 온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 이 나무가 되었다”라는 비석이 있다.

 필자가 이 비석을 본 지 40년이 되기에 `지금도 이 나무와 비석이 그대로 있나'하고 이 원고를 쓰기 위하여 중대사에 전화로 알아 보았더니 지금도 그대로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한암은 오대산 입산에서 입적까지 실존하였으면서 전설을 방불케 하는 데가 있다.

 승려생활은 부운유수(浮雲流水)와 같은 데가 있어 한암도 40대 말까지 여러곳을 주유하다가 그의 나이 50세에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촌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마음에 다지고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오면서 “다시는 상원사 동구 밖을 나가지 않겠다”는 계를 세우고 그 뒤 27년 그가 여기서 입적할 때까지 이 계를 지켜 상원사 동구 밖을 나가지 아니하였다.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의 좌등(佐藤)교수가 한암의 고명을 듣고 상원사를 찾아와 3일간을 지내고 떠난 뒤 여러곳에서 “오대산의 한암선사는 참으로 보기 드문 득도의 위인이라”고 말을 하여 한암이 속세에도 널리 알려졌었다. 일정말에 조선통치의 2인자인 대야(大野)라는 총독부 정무총감이 차편으로 월정사까지 와서 한암을 만나려고 상원사까지 평창경찰서장을 도보로 보내 월정사까지 와달라 하기에 “20년간 상원사 동구 밖을 나간 적이 없는데 정무총감이 만나자 한다고 나갈수 없으니 만나고 싶거던 상원사까지 오라고 일러달라”라고 전갈하여 보냈다.

 하잘 것 없는 촌부의 물음에도 “산사의 늙은 중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라고 답하는 그 겸허함이 권력에는 의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월정사의 진영당에는 한암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나 월정사에는 영정말고 한암의 두장의 사진이 소장되어 있다. 한 장은 정장을 한 한암의 생시의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한암이 운명하였을 순간의 사진이다. 한암은 입적할 때 앉은 채 입적했다. 입은 벌어지고 머리는 뒤로 제쳐졌으나 분명히 앉아 있는 사진이다. 색공(色空)이 다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 따로 있을리 없는 경지이다. 후일의 한국불교를 위하여 피난을 시켜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수제자 탄허(呑虛)는 통도사로 피난시키고 본인은 6·25사변을 미리 알면서도 피난치 않고 상원사에서 만화(萬化)가 임종을 지킨 가운데 앉아서 운명하였다.

 30여년 전의 중학교 교과서에 `절을 지킨 스님'이라는 단원이 한암의 이야기이다. 6·25사변중의 겨울오지의 부락이나 사찰을 작전상 이유로 불태울 때 월정사가 전소하였고 월정사를 태운 군인들이 상원사를 태우려고 할 때 한암은 “절을 태우려거던 나도 같이 태우라”고 가사장삼을 정제고 법당에 정좌하고 있으니 차마 불지를 수 없어 가람과 여기에 있는 국보인 동종이 함께 회진을 면하게 되었다.

 1951년 음력 2월 14일 아직도 6·25사변의 초연이 가시지 아니한 때에 참선하듯 앉아서 입적하니 난후 탄허가 돌아와 상원사 옆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모시고 그 탑비에 한암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웠으나 그 뒤 탄허와 만화가 입적한 뒤 이 3대의 부도와 탑비를 상원사 아래 쪽에 새로 세워 3대를 기리고 있다.

 최승순(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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