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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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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및고려
화천문화원  화천의역사  후삼국및고려

 

낭천은 본래 水原 崔氏의 본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부항(崔부抗)의 暮誌銘(1106)에 의하면, 그의 先代는 낭천으로부터 水原(수원)에 와서 水州人이 되었다고 한다. 후삼국 시절, 낭천지역은 당시 梁吉의 휘하에 있던 궁예에 의해 접수되었다. 「삼국사기」 권11, 진성여왕 9년조(895)를 보면 다음과 같다.

8월에 궁예가 猪足, 성川의 2郡을 빼앗고 또 漢山 管內의 夫若· 鐵圓등 10餘郡을 격파했다.

 

같은 책, 권50 弓裔傳에도 위와 동일한 기사가 나온다. 이로써 보면 한자씩 표기 「성川」은 적어도 후삼국 시절까지도 「狼川」과 함께 쓰이고 있었다. 효공왕 5년(901)에 궁예는 스슬 왕이 되었으니 이후 낭천은 궁예의 後高句麗(→摩震 →泰封) 영토였다.

王建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된 뒤, 통일신라 이래의 9주5소경 제도를 12牧으로 개편한 것은 성중 2년(983)의 일이었다.
이 개편작업에서 강원도 지방이 행정구획에서 빠진 반면 황해도 지방의 海州·黃州를 12牧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황해도에 행정력이 침투되었기 때문에 對北方 정책의 일환이라고 보기도 하고,
이때의 州牧은 지방행정 단위가 아니라 外官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후 고려는 顯宗 9년(1018)의 지방제도 개편을 거쳐, 대체로 睿宗代(1106~1122)에 이르면 5道 兩界制로 정착된다.
낭천군은 交州道의 春州 所管으로서 예종 원년에 監務를 두어 楊口를 兼任하게 하였습니다. 조선 태조 때에 다시 나누어졌다.

이에 體覆使 鄭承可는 양구에서 왜구와 싸우다 패하여 춘주까지 퇴각하였으나, 왜구의 추격으로 춘주마져 함락당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면서 (1385) 왜구의 침략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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